리딕(the Chronicles of Riddick, 2004)

영화보다 대굴대굴

리딕(the Chronicles of Riddick, 2004) :::

김승환 | 2004년 08월 13일
조회 4124

1. 중세 봉건시대

왕과 귀족, 성직자. 중세를 통틀어서 이 3종류의 계급은 항상 존재했었고, 언제나 사람들 위에 군림했었습니다. 때론 왕권이 모든 것을 아울렀고, 때론 교회의 권위가 절대적인 적도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는데 있어서 서로에게 조력자인 동시에 경쟁자였죠. 그리고 그들의 긴장감 섞인 역학 관계는 한 시기의 예술 양식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했다는군요. 보는 이를 윽박지르고 억누르는 듯한 장엄함과 엄숙함을 가졌고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건축물들이 그것입니다.

2. 2000년 <에이리언2020>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SF마니아들에겐 나름대로 주목을 받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원래 제목이 'Pitch Black'이었던 이 영화는 엉뚱하게도 <에이리언2020>이라는 제목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으면서 우리나라에 소개됐어요. 내용은 평론가들의 말처럼 같은 장르의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 영화가 눈길을 잡아끈 건 '리딕'이라는 캐릭터 때문이었죠. 도덕적으로 모호한 가치관, 신에 대한 증오, 가끔씩 내비치는 인간적인 감정 등 '리딕'은 판에 박힌 그런 캐릭터는 분명 아니었으니까요.

3. 2004년 <리딕-헬리온 최후의 빛>

이 영화는 알려졌다시피 1편으로부터 5년 정도 지난 시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1편과 비슷한 점이라면 장르가 SF라는 점 하나 뿐이에요. 그밖에는 모두가 달라졌습니다. 리딕(빈 디젤)이 싸워야 할 상대는 에이리언이 아니라 네크로몬거라는 외계 종족(인간의 일종)이고, 상대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닌 맞서 싸워야 합니다. 심지어 리딕마저 변했어요. 도덕적 모호성은 여전하지만 1편의 잭이 성장한 캐릭터인 키라(알렉사 다발로스)를 통해 사랑과 희생이라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전적으로 리딕에게 의존하는 스토리 구조이기 때문에 똥폼 잡는 리딕의 모습이 자주 보이고 전개에도 다소 무리가 뒤따르기도 합니다(왜 리딕 주변엔 항상 총이 아닌 칼 든 자들만 꼬이는지 궁금해지더군요).

결론을 말하자면 이번 편은 완벽하게 리딕을 위한 액션 영화입니다. 모든 것이 리딕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하다못해 빛과 어둠 어느 쪽도 사람들에게 이롭지 못한 교도소 행성의 자연 환경까지 말이에요.

4. 중세 기사 이야기의 SF판 변형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네크로몬거들의 조형물들입니다. 그것들은 네크로몬거의 특징을 대변하듯이 고통과 파멸의 이미지를 내포하면서 사람들을 위압하며 훈계하는 것처럼 내려다봅니다. 통치자, 전사, 성직자가 주요 계층인 네크로몬거의 체계와 연관시켜 볼 때 영락없이 중세의 여러 시기를 복합적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힘이 곧 법이며, 종교의 권위가 실생활을 지배하고, 전쟁에서 기사 1인 신화가 가능했던 시기가 분명 중세에는 존재했었거든요.

그렇다면 리딕은 퇴락했던 기사 계급쯤이 될까요? 어울리긴 하네요. 왕, 성직자, 기사들은 본질적으로 남을 위한다기보다 자신들을 위하는 계급이니까 말이죠. 그러고 보니 엘리멘탈(주디 덴치)의 말이 괜한 게 아니었어요. 리딕이나 로드 마샬(콤 피오레)이나 본질적으로 비슷한 데가 있는 판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무슨 수로 예측할 수 있겠어요?

어찌됐든 이 영화는 SF의 탈을 쓴 중세 기사들의 영화라는 얘기가 되는건가……. 이상은 영화 속 조형물들이 인상 깊어서 해 본 쓸데없는 생각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