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크> 즐겨라. 분노를

리뷰

<헐크> 즐겨라. 분노를 :::

윤현호 | 2003년 07월 16일
조회 3296

두 얼굴의 사나이 브루스 배너 박사(에릭 바나). 얼굴만 두 개가 아닙니다. 몸까지 두 개죠. 성질을 죽여야 할 이 친구가 폭발하면 가발 쓴 슈렉으로 변하거든요. 다행인 점과 걱정거리가 둘 다 있습니다. 우선, 배너박사는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습니다. 어떤 시비에도 그의 자제력은 헐크의 괴력에 맞먹어요. 문제는 시비 거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 그의 몸이 궁금한 정부와 관료들, 그의 아버지까지.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이 친구, 한번 헐크가 된 뒤로, 은근히 즐기고 있거든요.

즐겨라 분노를

<헐크>를 다루는 평들은 그의 선명한 녹색만큼이나 자명합니다. 모든 영화를 가족 영화 (가족을 위한 영화가 아닌, 가족 그 자체를 다룬, 그래서 가끔은 파괴적이기까지한...) 로 메운 이안(A)이 만들 블록 버스터이니까요. 덕분에 <헐크>와 관련된 평은 마치 정신과 의사의 진단서가 되고 말아요. 차트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라는 단골 단어가 빼곡하고 모든 사태를 부자관계에서 끌어내겠죠.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예요. 굳이 차트를 볼 필요가 있느냐죠. 그들만의 언어로 쓰여진 진단서를 보지 않더라도 관객들은 <헐크>에서 진짜 악당은 배너 박사의 아버지라는 걸 알아차립니다. 멀쩡한 배너 박사를 헐크로 만들기위해 아버지란 작자가 그러죠. '내가 보고싶은 건 니가 아니야.' 진단서를 보지 않더라도 사경을 헤매고 있는 환자는 식별 가능합니다. 흠뻑 젖어있는 침대시트와 초점을 잃은 동공만으로, 병실내의 무거운 분위기로도 그 증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헐크>를 통해 관객들은 비로소 이안의 고집들을 체험합니다. 진단서까지 볼 필요는 없어요.

<헐크>는 만화책의 흥분을 영화로 전달하려는 시도입니다. 만화책을 넘기는 듯한 멀티 편집과 화면 분할은 종종 의도하지 않은 폭소를 유도하지만 '헐크' 캐릭터의 과장미와 조화를 보여 줍니다. 파괴적 에너지로 가득한 영화를 묘하게 진정시켜주고 있죠.

초인 영화에겐 넘어야 할 난관이 있습니다. 스파이더 슈트를 입기 전의 파커, 슈퍼맨으로서의 사명을 알기 전의 클락, 무쇠 갈퀴의 쓰임새를 알기 전의 울버린, 본 무대에 올라가기 전의 무명 생활을 어떻게 단축하느냐의 문제죠. 굵지만 짧아야 하구요. 애타게 기다리는 관객의 조바심을 자극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배너박사는 무려 50분씩이나 무명생활을 보냅니다. 관객들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원죄를 범하지만 일단 무대에 오른 뒤, 이 친구의 독무대는 상당히 화려합니다. 헐크 본연의 임무, 즉 파괴의 카타르시스를 마음껏 자극합니다.

TIP

배너 박사 역으로 물망에 올랐던 배우는 조니 뎁. 조지 클루니, 벤 애플렉, 브랜든 프레이저, 스티브 부세미였답니다. 스티브 부세미같은 모험적인 캐스팅도 시도하는군요. ^^

이안이 <헐크>를 만들지 않았다면 <터미네이터 3>를 만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두 영화를 두고 저울질 했었다는군요.

왜 팬티가 찢어지지 않는지 과학적으로 풀어볼려는 노력은 하지 마시길. 단지 등급상의 문제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