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단기기억손실증

리뷰

<메멘토> 단기기억손실증 :::

강병융 | 2001년 09월 13일
조회 3205

저는 <메멘토>를 보면서 세 분류의 영화군(群)을 떠올렸답니다.

첫번째는 <사랑의 블랙홀>, <롤라 런>, <슬라이딩 도어스> 였습니다. 이 세편의 영화는 시간을 화두로 삼고 있죠. 그런 점에서 <메멘토>와 사촌 지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죠? <사랑의 블랙홀>과 <롤라 런>은 시간의 재생 반복을 함으로써 시간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던 영화입니다. 성격이 괴팍한 기상 통보관 필 코너스(빌 머래이 분)가 반복되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돌이켜보고, 결국 사랑도 찾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롤라 런> 역시 주인공 롤라(프란카 포텐테 분)가 남자 친구를 구하러 가는 과정을 재생 반복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에서는 같은 시간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반복된다는 설정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상으로 만들어낸 격입니다. 반면 <슬라이딩 도어스>는 시간을 분할하고 있습니다. 헬렌(기네스 팰트로 분)은 일전에 우리나라에서 꽤 인기를 끌었던 MBC의 인생극장이라는 드라마와 같은 설정이죠. 주인공이 이렇게 했을 경우와 저렇게 했을 경우를 따지는 시간을 분할한다는 설정이 아주 이채롭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프로스트의 '가지 않을 길(Road not taken)'이라는 시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아무튼 위에 말한 세 영화는 시간을 재미있게 비틀어서 만든 영화들입니다. 그런데 <메멘토> 위에 언급한 영화보다 한 술 더 떠서 아예 시간의 순차적인 성질마저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앞선 영화들이 시간의 분할이나 시간의 반복을 시도했다면, <메멘토>에서 보여준 시도는 시간의 역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결론이 나오고,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영화들에서 보여주웠던 플래쉬 백 소위 회상은 아니라는 것이 <메멘토>가 보여주는 참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영화들이 시간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멘토> 이후에 또 어떤 시도가 있을지 자못 기대가 됩니다.

두번째로 떠오른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와 <오! 수정>이랍니다. 왜 SF 영화가 생각났냐구요? 기억하시나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인조 인간들과 진짜 인간들의 차이점을. 예, 첫째는 수명 그리고 둘째는 기억입니다. '제대로 된 기억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설정이 제 머리 속에 막힌 셈이죠. 그런 의미로 본다면 레너드는 위치는? <오! 수정>의 경우 기억의 상대성에 관한 서사라고 할 수 있겠죠. 수정(이은주 분)과 재훈(정보석 분)의 서로 다른 기억. 재미있게도 <메멘토> 역시 기억의 상대성에 대해 보여주고 있네요. 레너드(가이 피어스)와 테디(조 판토리아노)의 기억 중에 우리는 누구의 기억을 믿어야 할지? 관객과 감독의 기억 중에서 어떤 것이 사실인지? 끝없는 의문을 갖게 것이 <메멘토>가 주는 또다른 재미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떠오른 영화는 <펄프 픽션>과 <휴머니스트>입니다. 앞에 언급한 것들과는 더욱 <메멘토>와 관련이 없는 것 같군요. 영화나 소설, 드라마와 같은 서사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플롯입니다. <메멘토>는 이러한 플롯에 충실한 영화입니다. 플롯은 인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왕과 왕비가 살았다. 왕이 죽었다. 왕비가 죽었다.'라고 한다면, 단순한 줄거리가 되지만, '왕과 왕비가 사랑하며 살았다. 왕이 죽었다. 왕비는 왕이 죽은 슬픔에 병이 나서 죽었다.'라고 한다면 플롯이 됩니다. 즉 사건의 원인을 있으면 플롯이 되는 겁니다. <펄프픽션>의 경우 사건들이 쪼개져 나열되어있지만 플롯이 존재하기 때문에 퍼즐처럼 조립하면 하나의 유기적인 구성이 되는 것입니다. <메멘토>의 경우는 <펄프 픽션>관는 달리 이야기들이 쪼개져 있지 않고, 역의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말한 시간의 역행과 관계 맺고 있는 것이죠. 즉 시간의 역행으로 인해, 관객들이 보기에 <메멘토>는 인과관계가 아닌 과인관계로 보여집니다. 결론이 먼저 나오고, 관객들을 영화를 보면서 원인을 차차 알게 됩니다. 기존의 인과 관계 플롯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겐 신선한 재미를 줍니다. 또한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이무영 감독의 <휴머니스트> 떠올린 이유는 탄탄한 이야기구조 때문입니다. <휴머니스트>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면 그 안 내적 구조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영화가 현실성을 가지려면 그 나름의 내적인 구조에 충실해야 하는데, 전 <휴머니스트>가 그런 류의 영화라고 생가합니다. <메멘토> 역시 그런 셈이죠. 사실 까놓고 보면 <메멘토>의 상황 설정은 <휴머니스트>보다 억지리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메멘토>가 설들력이 있고 리얼한 이유는 인과 관계가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멘토>는 기존에 플롯이 강한, 서사성이 강한 달느 영화들과는 달리 열린 결말을 던져줌으로써 더 높은 차원의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얘기를 하다보니 아주 길어졌습니다. 그죠? 두서가 없어졌죠,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고, 그건 제가 단기기억손실증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읽으시는 분들도 그러려니 하고 읽어 주세요. 그렇다고 이런 글을 쓰면서 문신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강병융
오넷콜맨, 살바도르 달리, 무라카미 하루키, 이제하, 장 비고, 키애누 리브스, 정성일, 쿠엔틴 타란티노, 무라카미 류, 이무영, 존 드 벨로, 김영하, 로이드 카우프만, 장정일, 디지 길레스피
- 상기 거명된 자들을 한꺼번에 믹서기에 넣고 갈아서 마시고 싶은 사람

강병융 님의 다른 기사 보기 >>

<< 강병융 님과의 대화

Readers' Comments

내 의견 쓰기

More Articles to Explore

<브리짓 존스의 일기> 있는 모습 그대로 - 영원한 사랑의 격언 (2001/09/13)

<파이널 환타지> 환상에 고하는 작별인사 (2001/09/13)

<메멘토> 단기기억손실증 (2001/09/13)

<타인의 취향> 유머 속에 숨은 배타주의에 대한 비판 (2001/09/12)

<늑대의 후예들> 꼴사나운 프랑스놈들 (2001/09/12)

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