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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지기 | 2000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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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들은 발표될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있어왔다. 혹자는 그의 영화가 현학적 기호로 채워져있다고 비난하고 또 한편에선 그의 영화야말로 감각의 카니발이라며 격찬한다. 그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영화구조를 깨뜨리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언어를 창조했다. 그리너웨이 영상의 가이드북을 선사한다.
*Greenaway Style 1: 내러티브의 파괴
"영화라는 매체는 복수의 의미를 함축하는 데 아주 뛰어난 예술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풍부한 의미망을 지닌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관객들이 다양한 해석을 내리는 것을 보며 즐거워 한다. 가령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같은 경우 상징주의적 에세이로 읽히는가 하면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역사에 대한 탐구로 읽히기도 하고, 반 대처주의와 친 대처주의 모두로 해석되는가 하면 한 편에서는 반 페미니즘 영화라고 하고 또 한편에서는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영화라고 진단 내리기도 한다. 모든 영화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감독과 관객이 각자의 의도를 가지고 줄다리기하는 복잡한 게임이다." -Peter Greenaway
피터 그리너웨이는 영화라는 텍스트로 관객과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관객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의존하는 내러티브를 마구 파괴하고 그 안에서 관객이 실마리를 찾아가도록 게임을 건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양극을 달린다. 지나친 현학적인 어법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의 영화에 한 번 맛을 들인 사람에겐 바로 이런 점이 헤어나올 수 없는 마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너웨이가 내러티브를 다루는 방법들을 대체적으로 분류해본다.
텍스트의 새로운 가능성:
92명의 허구적인 인물의 전기를 통해 세계 종말이후의 세계를 그려낸 3시간 30분 짜리 환타지 <몰락 The Falls>. 이 영화는 영국영화로는 30년만에 처음으로 BFI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이 영화는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92가지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너웨이 스스로 '카탈로그 영화'로 표현한 이 영화 이후 그리너웨이는 더욱 더 기존 내러티브의 파괴에 빠져 들어갔다. 그리너웨이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오마쥬라 부른 에서 관객들은 나레이터의 목소리를 따라 가공의 도시를 산책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관측, 기준, 지표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는 관객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고 결국 길을 잃게 만든다. 뒤이어 발표된 <버티컬 피쳐스 리메이크 Vertical Features Remake>는 일종의 '영화 제작'에 관한 작품인데, 그리너웨이 작품에 등장할 인물들이 미리 소개된다.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의 제도사, <건축사의 배>의 건축사, <요리사,도둑...>의 요리사, 의 지도 만드는 사람 등이 등장하는 것. 이렇게 그리너웨이는 자신의 작품을 패러디하고, 절묘한 풍경과 마구잡이 편집을 뒤섞어 내러티브를 파괴한다.
분할. 수수께끼:
1982년 작품 <영국식 정원살인사건 The Draughtsman's Contract>은 알쏭달쏭한 게임의 법칙을 적용한 영화. 인물과 스토리 같은 주류 영화의 요소들이 그리너웨이의 형식주의적/ 구조주의 영화들과 뒤섞인다. 이 영화에도 역시 영화와 예술과의 관계, 문학적 담론과 회화적 구도등 지적인 영화장치들로 가득하다. 85년 다윈의 진화론에 의거한 (하나의 Z와 두개의 O)로 게임과 수수께끼를 영화의 양식으로 도입하고 86년의 (건축가의 배)는 로마건축양식의 일곱 시대에 따라 일 곱 부분으로 영화를 나눠 버렸다. 87년의 (차례로 익사시키기)는 온갖 게임과 수수께끼, 패러독스, 아이러니 속에서 1부터 100까지의 숫자가 온갖 방식으로 화면에 구현된다. 89년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는 분할의 모든 구성이 극점을 이룬다. 열 가지 코스의 식사와 레스토랑의 일곱 가지 색깔, 그리고 일주일의 7일간이라는 의미에서 열개와 일곱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미궁, 타 장르와의 결합:
91년의 (프로스페로의 서재)를 기점으로 그리너웨이의 내러티브 파괴는 단순한 분할과 수수께끼가 아닌 텍스트의 확장과 결합으로 이어진다.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각색하여 바다속에 유배된 프로스페로의 24권의 책들을 중심으로 문학과 영화가 결합된 내러티브의 미궁을 창조해낸 것. 그런가 하면 (베이비 오브 메이콘)에서 종교적 예식의 엄숙함과 오페라의 화려함을 영화에 도입시켰고 그 모든 장르적 결합의 극치가 <필로우 북>에서 나타난다.
*Greenaway Style 2: 상징의 뫼비우스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들은 필름으로 싼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이다." -Hallen Kennedy-
그리너웨이는 화가이며 건축사의 이력을 갖고 있다. 그의 영화들은 현학적이라는 비난을 들을만큼 온갖 기호와 심벌들로 가득하다. 처음에는 낯설거나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고 그리너웨이의 왕국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디테일에 숨겨진 암호들을 찾아낸다면 당신은 다른 감독의 영화들은 더 이상 즐거워 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너웨이의 암호를 읽어내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문자/숫자:
<하나의 Z와 두 개의 O>의 Z는 동물원(zoo), 제브라(zebra)와 끝(알파벳의 마지막), 즉 죽음을 상징하고 O는 제로=무(無)를 상징한다. 그는 이 영화를 여덟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이유는 다원의 8단계 진화론을 영화의 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차례로 익사시키기>에서는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화면 곳곳이 숨겨놓고 순서대로 보여준다. (나무위의 '1'자, 소의 엉덩이에 찍힌 '76'. '77'...) 또한, 베니스에서 촬영되었던 초기 단편 영화중 하나인 <인터발 Intervals>은 비발디의 음악을 사용한 까닭에 비발디의 기보법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베이비 오브 메이콘>에서도 형벌의 횟수를, 저주의 숫자 13을 사용하여 "13+13x13..."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비극성을 더한다.
둘째, 컬러:
색을 사용한 상징이 극에 달한 작품은 <요리사, 도둑...>이다. 옥외의 차갑고 짙은 감색, 음식이 가득한 주방의 녹색, 레스토랑 내부의 피를 연상케하는 붉은 색, 탈속(脫俗)적인 느낌을 주는 순백, 지성을 모은 도서실의 황금색, 자애와 생명력을 상징하는 병실의 황색... 마치 순회무대처럼, 계속해서 관객 앞에 제시되는 이 컬러들은 단순한 색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독특한 의미를 창조한다. 가령 이런 대사 --"(도둑) 검을수록 가치가 높다..... 인간은 검은 것을 좋아한다. 검다는 것은 죽음이다. 그리고 검은 것을 먹는 것은 '죽음'을 먹는 것이다." 이 말을 증명하듯이 알버트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마이클의 육체는 '새까맣게' 구워져 알버트의 눈앞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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