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외디푸스 현상과 저항의 이미지 전략, 그 한계 :::
김지훈 | 2000년 04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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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산(美國産) 영상 텍스트들이 점유한 헤게모니의 핵심, 또는 그 권역(圈域) 언저리에는 상이한 욕망과 욕구를 품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이 공유하고 있는 다수의 시간성, 다층적 역사성, 뒤얽힌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존재한다. 이 텍스트들은 이러한 주체들이 공유하는 열망들을 동결하고, 이를 상상적 유토피아의 서사로 재단함으로써, 정체성을 향한 욕망들이 분출되는 지점에서 폭발하는 첨예한 갈등의 상흔들을 해소한다. 현재 미국 영상 텍스트에서 분출하는 저항과 유토피아의 발원지는 후기 자본주의에서 드러나는 증후이자 병리의 근원인 탈외디푸스 현상이다.
음모 이론, 혹은 외디푸스 내러티브 Oedipus Narrative의 회복 최근의 주류 헐리우드 영화에는 비가시적인 실체로 존재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영역을 휘감는 테크놀로지 네트워크를 둘러싼 불안과 기대가 경합한다. 자본주의가 이윤의 흐름을 가속화하고 내밀한 사적 영역을 소비 자본주의의 구매 공간으로 재조정하는 와중에 혼란과 무기력증에 빠진 주체들은, 이러한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테크놀로지의 황홀경 속에서는 자신의 총체적 인식 능력과 지배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불안에 빠져 있다.
잃어버린 조망 능력을 회복하고 불확정성의 원리로 가득 찬 세계의 질서를 통괄하기 위해 진실의 영역은 테크놀로지의 투명한 벽 저 너머로 돌려져야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계의 미지의 존재가 기억과 역사의 불균등한 자취들을 균질화할 수 있다는 신념, 혹은 권력의 비가시적 그물망이 우리의 삶 전반을 통제하고 있으며 이 통제의 외벽을 깨치고 나면 경험의 충일성과 기억의 충만함을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들이 우리 시대의 이미지를 구성하고 서사의 중심을 형성한다. 이러한 희망에 신뢰를 보내는 주체들은 헐리우드가 이데올로기적 지지자로 점지했던 계층인 백인 중산층 성인 남성들이다. 이들을 소구의 대상으로 삼는 영화는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언술로 집약되는 서사, 즉 "음모 내러티브(Conspiracy Narrative)"를 전면에 등장시킨 『트루먼 쇼 The Truman Show』, 『다크 시티 Dark City』, 『엑스 파일 The X-File』이다.
 이 세 영화의 설득력은, 주체를 둘러싼 물질적 조건은 물론 심리적 현실까지 관리하는 통제 사회의 생성을 묘사하고 이에 따른 주체의 비인간화를 경고하는데 있다. 이 과정에서 통제 사회의 언저리에는 산업화와 탈산업화의 여파에서 밀려나간 소외와 상처의 타자들이 투사된다.(『엑스 파일』) 비가시적 권능들의 장악력을 벗어나는 주체의 탈출은 권력이 부여한 에덴의 동산 속에 감추어진 미몽(迷夢)을 깨치고 나면 상실했던 근대적 생활 세계의 이상적 골조를 복원하기 위한 저항의 여행이다.(『트루먼 쇼』, 『다크 시티』)
이 세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탈산업 사회의 시공간 재편 과정에서 현대의 주체들을 압박하는 가족의 해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여적으로 그 영향력을 고수하는 가족적 동일성의 회복이 맞물려 있다. 이 세 영화의 주인공 모두는 성적 욕망의 실현과 가족의 구성을 저해하는 기억의 상실과 직면에 있다. 트루먼 버벅(Truman Burbuck)과 멀더의 심리적 외상은 아버지의 실종이며, 『다크 시티』의 주인공 존 머독(John Murdock)의 결혼과 관련된 기억의 해체로 인해 혼란에 빠져든다. 심리적 회복의 플롯 덕택에 관객은 이 세 남성들이 처한 위태로움,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규범의 와해와 공감하는 가운데, 이상적 세계의 윤리적 질서가 가족(또는 가족사(家族史))의 재구성으로 치환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이 치환 과정에서 탈산업 사회를 둘러싼 모순들의 골은 가족의 회복으로 굴곡 없이 메워진다.
"냉소주의 텍스트"에서 "틴스플로테이션 Teensploitation"으로 탈현대화 과정에서 사회적 규범에 발생한 균열과 틈새를 봉합하기 위한 백인 남성의 위기의식은 이들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주체들의 일탈 및 순응 과정과 병존하고 있다. 최근의 미국 미디어에서 가장 소구의 대상으로 삼는 표적 관객(Target Audience)들은 젊은이들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일련의 불온한 독소들이 과감히 미국 주류 미디어의 중심으로 잠입했다. 소년 소녀들은 텔레비전 소파에 걸터앉아 이 "냉소주의 텍스트 Cynicism Text"들을 즐기며 통쾌함과 만족을 체험했다. 냉소주의의 표본〈비비스 앤 버트헤드 Beavis & Butthead〉는 이제 고전이 되었다. 뒤이어 똑똑하고 생뚱맞은 10대 소녀의 허스키한 독설로 유명해진 〈다리아 Daria〉가 제법 심지 박힌 10대 시청자 골수 팬들을 확보하더니, 이제는 〈사우스 파크 South Park〉가 백인 중산층 문화의 허세와 위선거리를 과감히 조롱의 도마에 올려놓고 있다.
이 불온한 TV 시리즈물은 모두 90년대 초반과 중반까지 가속화된 중산층 가정의 파괴와 구직 가능성 부재에 직면한 젊은이들의 막다른 골목에 가로놓인 도피처들이었다. 젊은이들이 지지했던 TV 시리즈의 반영웅들은 부모 세대의 고리타분함과 고루함에 기꺼이 손을 저어대는 것은 물론, TV 리모콘과 헤비 메탈(<비비스와 버트헤드〉), 독서와 천문학(〈다리아〉)에 빠진 괴이하고도 기이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통렬한 목소리는 억압적인 권위와 위선적인 중산층 보수주의로 점철된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강요하는 세계관이 그 유효기간을 초과했다는 비판이다. 이 비판은 청소년층의 지지와 어른들의 근심에 찬 센세이션을 촉발했으며, 냉소주의 텍스트의 대표선수 비비스와 버트헤드는 중하류층 10대 백인 남성 낙오자들의 폭력과 반규범 행위 욕구를 충족시키는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그런데 〈다리아〉를 제외한 이러한 텍스트들에 출몰하는 "무뢰한"들의 공격 대상에는 여피(yuppie)와 공화당 우파, 아버지 세대들인 좌절한 히피(hippie)뿐 아니라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성적 소수자들, 여성들까지 포함된다. TV화면을 순간적으로 일별하는 리모콘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차별적인 냉소의 물결에는 절망에 찬 독설과 증오 섞인 비아냥이 혼재된 채 방출되어 브라운관 너머로 사라진다. 이 반영웅들의 골칫거리 행위는 소파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소일하는 10대 주체들에게 어울린다. 따라서 변혁적 추진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무뢰한들의 저항적 힘은 다른 편견들과 뒤섞인 채 TV 전파의 흐름 속으로 용해되어 버린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로 반영웅들의 기세가 쇠퇴할 무렵, 미국의 경제 호황과 맞물려 반동주의적 함의를 띤 연쇄살인마 공포 영화 slasher film가 부활했다는 시대적 동시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 한 일을 알고 있다.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와 『스크림 Scream』, 『캠퍼스 레전드 Campus Legend』, 『패컬티 Faculty』등 가면을 뒤집어 쓴 광인과 에어리언 Alien이 관객의 눈길을 피범벅으로 자극하는 이 영화들은, 성적으로 방종하고 너저분한 10대 소년 소녀들이 지닌 성적 욕망의 매혹과 이에 대한 위협과 처벌 모두를 등장시킨다. 이는 80년대 『나이트메어 Nightmare』, 『13일의 금요일 Friday on the 13th』에 등장한 살인마들의 희생 제의에 바쳐진 10대 소년 소녀들의 죄목이었다. 다만 그 당시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최근의 10대 관객들은 순진하게 살육과 피의 축제에 넋을 잃기보다는, 이 카니발을 움직이는 규칙들과 유희하는 나르시즘 속에서 자신의 불안을 가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불안은 아직 미성숙하고 즉흥적인 백인 10대 남성들의 공격적 욕구, 그리고 로맨스의 열망과 맞닿아 있다.
말하자면 비비스와 버트헤드의 언어 유희와 침뱉기 놀이에서 출구 없는 미래를 투사하던 젊은이들은, 이제 제법 풍요해진 주머니 사정 덕택에 다른 소구 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새로운 공포 영화, 혹은 "틴스플로테이션 Teensplotation"이라 불리는 최근의 10대 영화들의 곳곳에는 백인 10대 남성들 주변을 회전하는 편견의 편린들이 진열되어 있다. 『스크림 2』에서 가공할 만한 극장 살인 장면의 희생양은 수다스러운 흑인 커플이며, 『패컬티』에서 외계 생물체의 감염을 발원하는 모체 역할을 하는 주인공은 호기심 많고 얌전한 전학생 소녀다. 10대 청년들의 사회화 과정에서 겪게되는 성적, 인종적 편견과 폭력적 조롱은 "냉소주의"라는 심리적 태도를 절단하는 사회적, 심리적 현실들의 불균등함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음모 내러티브"와 "냉소주의 텍스트"는 헐리우드 주류 텍스트보다는 더욱 전향적인 태도로 복합적 이데올로기들에 각인된 모순의 골과 대립의 결들을 전개할 수 있는 저항적 전략을 전개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전략이 성공적으로 작용하는 양식뿐 아니라 실패하는 양식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략이 실패하거나 자신의 의도를 훼손하는 그 지점은 곧 미국적 영상 텍스트들이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백인 남성 중심적 가치관의 봉쇄와 그 한계를 드러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인종적, 성적 소수자들의 욕망과 매혹을 바탕으로 한 서사 양식, 그리고 그들 나름의 상이한 시간과 다층적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 이미지 양식이 접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필자 김지훈은 영화평론가로 활동중이며, 영화이론 홈페이지 CineSpas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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